댓글목록
realyhh님의 댓글
realyhh 작성일
유토피아는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것 이라는 표현이 참 와닿네요... 그런데 의문인 것은 좌파에 필요한 것은 "신앙적인 열정" 으로 글이 전개되다가 갑자기 국가보안법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서 헷갈렸어요...
realyhh님의 댓글
realyhh 작성일
목소리 높은 좌파들이 번번이 그들이 ‘주사파’라 경멸하는 이들에게 패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문장도 "그들이" 를 "그들을" 혹은 "자신들을" 로 바꾸면 문장이 좀더 쉽게 이해될것 같네요. 처음에 주사파가 무슨뜻인지 몰라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tkabyss님의 댓글
tkabyss 작성일
realyhh // 좌파적인 행동은 비가시적인 현현성, 즉, 드러나지 않게/않으면서 행동하는 것이 그 본질이라,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고 또 그 습성이라는 건데, 한국의 경우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심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드러내지 '못하고' 행동하게 되었고, 그것이 이 나라 좌파의 행동양식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듯 합니다.
pluspen님의 댓글
pluspen 작성일
정체성으로 시작한 논쟁이 점점 산으로 가는 듯...ㅋㅋ
keno21님의 댓글
keno21 작성일
..
keno21님의 댓글
keno21 작성일
유토피아의 작동이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된다는 얘기라구요? 기본적인 텍스트 이해도 못하신 겁니다. 몰이해를 당의정을 씌워 얼버무리는 솜씨는 일품입니다. 그렇다면, 지젝이 <꼭두각시와 난쟁이>에서 오늘날의 추한 난쟁이는 신학이 아니라 사적유물론이라고 말한 이유는 뭡니까? 라캉주의에서 충동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얼정'이 아닙니다. 바로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과학이라는 것이지요. 진선생님, 당신이 낭만주의자라는 것은 아시고 계시나요? 상상력의 소산을 실체로 착각하는 사람 말이죠. 그리고... 제발 낯 뜨거우니 라캉-지젝은 좀 제대로 공부한 이후에 인용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글에서는 요구와 욕구도 구별하지 못하셨더라구요. 제발.
tkabyss님의 댓글
tkabyss 작성일
keno21 / 저도 진중권씨가 프로이트-라깡이나 지젝을 인용할 때는 많은 오류가 있다고 느낍니다. 저번에 여기서 본 것 같은데, 상상계와 상징계도 용어를 잘못 쓰고 계시더군요. 지금 이 글에서도 '과학'과 '충동(혹은 열정)'을 어느정도 대립적으로 쓰고 계신데, 여기서 말하는 과학이 라캉의 <사드와 칸트>에서 라깡이 비판하는 과학인지, 아니면 그 논문에서 스스로 '욕망(혹은 충동 - 세미나 11 참조)'에 대한 진정한 과학으로 제시하려 하는 그 과학인지 (물론 논의대로 라면 전자의 의미겠지만) 분명치도 않고, 개념 사용에 특별한 고려도 없는 것 같습니다... 라깡을 많이 공부한 건 아니지만, 저에게도 오류가 보일 정도면 좀 심하지 않나 싶네요. 다른사람도 아니고 진중권인데...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1. 지젝이 그렇게 말했군요. 마침 제가 5년 전에 쓰고 지금 인용한 원글에는 그렇게 되어 있는데, 우연의 ㅤㅇㅣㅊ치 치고는 매우 흥미롭네요. (의심나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세요.) 왜 지젝이 오늘날 난쟁이는 사적 유물론이라고 그랬냐구요? 좋은 질문입니다. 님이 먼저 답변을 해 보시지요. 그러면 제가 답변을 드리지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열정이란 표현도 시비를 거시네요. 할 일 없는 훈고학자들의 전형적인 특성인데, 거기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이란 그 행동의 메카니즘이 합리성 위에 서 있는 게 아니라는 의미이지, 비합리성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지요. 지젝까지 갈 것도 없이 모든 정신분석학이 그 짓 하는 거 아닙니까?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의학적 설명도 마찬가지구요.
꼬투리를 좀 잡을 걸 잡으세요. 그건 그렇고 지젝이 왜 오늘날 난쟁이는 사적 유물론이라고 했는지, 님의 해석이나 좀 들어봅시다.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그리고 주제 파악 좀 잘 하세요. 저 글의 주제는 발터 베냐민의 역사철학테제에 나오는 구절에 대한 해석을 지금의 맥락 속에 옮겨놓는 데에 있습니다. 지젝이니 뭐니, 전 별 관심 없거든요. 그의 헤겔 해석은 정말 가공할 정도더군요. 아마 그 자신도 님 같은 분들한테 공격 많이 당할 거예요. 헤겔을 알고 좀 인용하라고....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theabis/ 둘 다 아니거든요. 지젝의 의미도 아니고 라깡도 아니고, 그냥 일상용어에 가깝게 쓴 거거든요. 제가 어디 님들 같은 지젝 훈고학잡니까? 아니잖아요. 그래서 님들의 호들갑이 매우 해괴하게 느껴집니다.
hj0084님의 댓글
hj0084 작성일
너무 어려운 얘기를 해서 못 알아듣겠네요. 대화를 통해 다름을 맞춰나가는 정치가 부재한 사회현실에서 진보도 보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어려운 담론보다는 실현가능한 문제들의 해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보다 생산적인 결론이 도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slaim님의 댓글
slaim 작성일
와 진중권 아저씨가 직접 댓글 다셨다
sweetjj님의 댓글
sweetjj 작성일
하나도 이해가 안가는데요. 가끔 기사 뜨면 읽으려고 하는데, 왜이렇게 어려운지.전 그래도 대학은 졸업한 사람인데, 도통 뭔소리지 모르겠어요. 공부를 해야 되나요?앞으로는 좀 쉽게 써주실수는 없나요? 이 글을 이해할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1%도 안될 것 같아요. 그리고 정치는 문화에 포함되는 개념인가요?
baltak1님의 댓글
baltak1 작성일
이런 멋드러진 담론들 속에 언제나 눈에 안보이는 진짜 현실적인 문제들은
지면 뒤로 숨죠. 첫 만남 자리에서 정기 구독을 반쯤 강요하는 유명한 좌파 인사나
한 달에 80만원 짜리 과외를 보내는 진보신당 당원인 엄마 아빠를 실제로 보는 일은 유물론-관념론-모순 같은 개념적 상상력과 다른, 묵직한 감정적 추락을 동반한
진짜 복잡함과 심란함을 선사해주죠.
이렇게 치열하게 인간과 자신들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모이고 연결 되어 있는 집단 또한 그 나름의 윗선들에선 만만치 않은 로비 시스템
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
도대체 이런 현실 속에서 그 놈의 복잡하고 고상한 좌파 정체성에 대한 주제 파악
을 니가 잘하네 내가 더 잘하네 하는 게 무슨 그리 자기 존재를 위협하는 큰 일이라
고 핏대 세우며 새 날아가는 소리를 하는지 통 몰겠다
baltak1님의 댓글
baltak1 작성일
진짜 치사하다는 생각 밖엔....
sweetjj님의 댓글
sweetjj 작성일
아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문화예술인이 정치에 나서려고 하는거 정말 보기 않좋습니다.
offname님의 댓글
offname 작성일
유대교에 대한 개혁적 반론으로 시작한 기독교가 서구 유럽에서 중세의 지렛대를 이용해 세력을 키운 역사의 그늘에 한국도 물들어 가나보다, 생각해 봅니다. 글의 논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무기와 장비가 죄다 서구철학의 쇼핑몰 구매용품에 의거하는 스스로를 깨 나가시길,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의 모습에 유토피아적 근접을 보여주시길 바라는 것은 외람된 요구는 아니길. 라캉 스스로 언어가 미끄러진다고 했거늘 왜 그토록 인용과 전치의 수사학을 그 치들에게 몰입하는거요?
offname님의 댓글
offname 작성일
진중권님을 비롯한 많은 평론가들은 자기 언어가 없이 외국놀로지에 빙의된
솜사탕 장수 같아 씁쓰르 합니다.
coldplay37님의 댓글
coldplay37 작성일
괜한 트집 잡지 맙시다. 이 글에 사용된 개념 중 어떤 것이 정확히 어떻게 잘못 '이해'한 것인지 제시하지 않고, 비겁하게 '잘못되었다'는 말만 던지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솜사탕 운운한 분 보세요, 그럼 진정한 한국인의 글이 되려면 한국 사상가의 글만 인용해서 써야 합니까? 그러한 식으로 자기 언어를 표방하는 순수주의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suww37님의 댓글
suww37 작성일
아픈 지적들이네요. 진보신당 초창기에 심상정씨가 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게 자기도 사교육 시키는 부모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는 거였어요. 한 개인의 정체성을 좌우로 명확히 진단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또 그렇게 구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의미하고요. 진보의 개념이 절대로 부재한 한국의 현실속에서 이상을 갖되 잊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keno21님의 댓글
keno21 작성일
진선생님 직접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영광입니다. 게다가 훈고학자라는 호칭까지요. 감사합니다. 훈고학자 시늉이라도 낼 수 있어야 할 텐대요. 벤야민의 꼭두각시와 난쟁이 알레고리에서 학자들의 논쟁은 주로 그 '신학'이 무엇인가에 집중되었지 난쟁이는 왜 숨었어야 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사실 벤야민의 글에서 그 이유는 매우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거창한 해석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말씀이죠. 선생님께서 인용한 부분에도 정획히 나와 있습니다. "오늘날 신학은 왜소하고 추해져서 들여다보여서는 안된다."(최성만의 번역본은 좀 더 분명합니다. "오늘날 주지하다시피 왜소하고 흉측해졌으며 어파치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신학")
즉 벤야민이 이 글을 쓴 1940년 어간의 유럽사회에서 신학이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연히 근대적 세속화의 열기가 최고조에 이른 당시 상황에서 신학은 전근대적 폐습을 대표하는 제도적 기독교와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므로 신학이 감춰져야 하는 이유는 전역사적으로 보편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당시의 유럽이라는 특수상황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대 선생님께서는 벤야민의 이 발언을 토대로 "유토피아의 작동은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된다"는 식의 그야말로 관념적인 보편적 결론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따라서 지젝이 "오늘날의 난쟁이는 사적유물론"이라 한 이유도 분명해 집니다. 무슨 해석이 필요한 얘기가 아니라는 거죠. 즉 지젝은 현존 사회주의가 몰락하여 마치 공산주의의 오류가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처럼 보이는 1990년 대 이후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사적 유물론이 추한 곱사등이로 전락해버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탈세속화라는 포스트모던적 경향으로 인한 세계적인 종교 재부흥으로 이제는 신학이 수연을 문 멋진 모습의 꼭두각시와 같게 되었다는 것이구요. 벤야민이나 지젝에게 중요한 것은 과학적 사유와 실천이 '믿음'이라는 추동력과 맺고있는 관계일 것입니다. 벤야민에게 그것이 결합되어야 할 것이었다면, 지젝에게 그것은 동일자에 관한 시차적 관점일 뿐입니다.
저는 진선생님이 자유주의자든 진보주의자든 상관없이 좋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사회적으로 발휘하는 데 선생님은 중요한 시민적 모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널에서 글쓰기 하실 때 이론적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매우 신중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개념이 이론적 맥락에 맞는가의 문제 뿐 아니라 대중독자와 갖는 관계의 윤리성과도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선생님이 이번 김규항 선생님과의 논쟁에서 라캉을 사용할 경우 선생님이 칼날을 쥐시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또 TV에서 멋진 모습 기대합니다. 선생님은 기존의 내공으로도 이 모든 일을 충분히 훌륭하게 수행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더욱 발전하시기 위하여 새로운 이론을 접하실 경우 이를 성급하게 활용하기 보다 시간을 두고 치밀하게 연구하신 후 마음껏 활용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비판자들에게 몇 마디.
1. 비판을 하려거든 '엄밀하게' 하세요. 이 글의 주제는 지젝이 뭐라고 했느냐가 아니라, 지젝이 인용한 발터 베냐민의 역사철학테제 첫 명제에 관한 해석입니다. 지젝은 내가 그 명제에 다시 돌아오게 된 계기에 불과하지요. 일단 글의 주제파악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2. 개념을 잘못 사용했다고 주장하려면, 원래 그 개념이 어떤 것인데 진중권이 어떻게 오용하고 있다고 '엄밀하게' 좀 규정해서 말씀해 주세요. 지젝과 라캉은 혼자 전세 낸 듯이 말씀하지 마시고. 개념에 대한 해석은 학자마다 다 다르기 마련인데, 무슨 깡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게 유일하게 옳다고 주장하는 건지, 그 용기의 근원이 궁금합니다.
3. 애들은 스파이더맨 영화 보고 나와서도 아직 온 몸에 영화를 뒤집어 쓰고 있지요? 그래서 벽에 막 달라붙곤 하지요? 책 한 권 읽고 똑같은 짓 하는 어른들이 있어요. 그 소아병적 태도에서 벗어나세요. 사람들이 모든 개념을 라캉이나 지젝의 의미로 사용하는 건 아니랍니다. ,
4. 누군가 어떤 개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를 판별하는 제 기준은 그 개념으로 현실을 얼마나 잘 설명해내느냐에 있습니다. 개념들은 도구 혹은 연장에 불과합니다. 도구 설명서만 줄줄 외우지 말고, 정말 그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그걸 못하니 최신 사상 들여다가 고작 훈고학을 만들어 버리는 게 대한민국 인문학계의 고질병 아니던가요?
5. 쓸 데 없는 열등의식은 버리던가,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좀 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승화시키세요. 저는 제가 여러분들보다 잘낫는지 못났는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길 바래요.
6. 저는 글을 쓸 때 고졸자를 염두에 두고 씁니다. 제 글이 어렵거든, 본인이 혹시 --적어도 인문학의 영역에서는--고졸자가 갖춰야 할 이해력을 갖추지 못한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세요. 도대체 얼마나 더 쉽게 써야 합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 그렇게 어려운 얘기를 나처럼 쉽게 전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요?
7. 애초에 문제 제기한 분들, 답변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기에 안 들어올 거라 믿고 쓰신 것 같은데, 님들이 늘어놓는 레퍼토리는 새로운 게 아니라 제가 글쓰기를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제 뒤통수에서 들려오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이 참에 그 분들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제가 확인해 보고 싶어서, 순수한 궁금증에서 한번 댓글 달아보았습니다.
아, 논리가 막히면 싸가지 타령하는 분들. 바로 그런 싸가지야말로 토론을 가로막는 걸림돌, 혹은 토론을 회피하는 방패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는 점 밝혀 둡니다.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keno21/ '신학'이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신학으로 이해하신 모양이군요. 솔직히 기가 막힙니다. 1940년대에 신학이 갑자기 누추한 것이 되었다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1. 여기서 신학이란 바로 사적 유물론과 더불어 베냐민 사상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유태교의 메시아주의입니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면 이를 관념론적 요소라 배척하겠지요. 베냐민의 매력은 과학적 유물론을 (어떤 의미에서 그것과 180도 대립하는) 신학적 열망과 결합시켰다는 데에 있지요. 지젝이 그것을 다시 꺼내든 것은 바로 그 때문이기도 하구요.
2. 지젝이 왜 오늘날 난쟁이는 사적 유물론이라 불렀는지는 아마 그만 알겠지요. 내가 5년 전에 지젝과 똑같이 말했던 것은, 제가 80년대에 직접 경험하고 실천했던 사적 유물론이 사실은 세속적 형태의 종교, 세속적 메시아주의였다는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즉 40년대의 맥락에서는 '과학'으로 이해되었던 것이 지금 생각해 보니 실은 '신학'에 불과했다는 것이지요.
3. 하지만 오늘날에도 유토피아의 열망, 메시아의 희망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니 벤야민에게 유태교 메시아주의가 했던 역할을 오늘날 내게는 사적 유물론이 한다고 보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썼던 거죠. 지젝도 제 생각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아요.
그 신학이 '메시아주의'를 가리키든, 사회주의를 가리키든, 그것에 대한 열망은 우리의 모든 실천 속에서 작동해야 하나 눈에 보여서는 안 됩니다. 매우 모순적인 규정이지요. 지젝이 이 얘기를 다시 꺼낸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베냐민의 알레고리야말로, 과학과 (종교적, 새속적) 메시아주의, 칸트의 이율배반처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 두 대립항을 동시에마치 활줄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 유지하는 새로운 사유의 습관(이른바 시차적 관점)의 탁월한 예가 된다고 본 거죠.
이해가 되셨나요? 본인이 이해가 안 되셨으면 비판이나 비난을 하기 전에 질문을 하세요. 형식만 제대로 갖추면 제가 친절히 다 대답해 드릴 테니....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아, 이번에 5년 전과 달리 난쟁이를 다시 '신학'이라 부른 것은, 베냐민의 언급을 원문 그대로 인용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헷갈린다고 하더군요.)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라캉의 상징계. 상상계 어쩌구 하신 분도 나와주세요.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대중적 글쓰기, 대중적 논쟁에는 뛰어난 전사인지 모르나 학문적 엄밀성이나 성실성에서는 글쎄.. 상당한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뭐, 대충 이런 식으로 정리하고 싶으시겠지요. 이런 얘기, 새로운 것도 아니고 내 뒤통수에서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 지겹거든요. 그 얘기를 왜 내 앞통수에다 대고 하는 용감한 학자는 한 놈도 없는지.... 그리고 대중적 글쓰기, 대중적 논쟁은 허투루 하는 줄 아세요? 쉽게 쓰면 정말 쉽게 쓰는 줄 알아요. 님들, 이 바닥 들어오면 아마 하루만에 전사할 거예요. 워낙 험한 동네라, 몇 합 겨루다 보면 실력 그대로 뽀록 나거든요.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훈고학에서 벗어나 자기 사유를 하세요. 개념은 그냥 연장으로 간주하세요. 이론은 저자가 그냥 해본 소리라 생각하세요. 거기에 무슨 경전과 같은 아우아를 부여해가며 신봉하지 말고...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의미는 '사용'에 있습니다. 이는 낱말의 의미만이 아니라 이론에도 적용되는 말이지요.
이론을 대할 때에도 비판적으로 대하시구요. 지젝이요? 솔직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더군요. 별의 시차, 달의 시차, 해의 시차. 거기서 언급된 주제들이 솔직히 무슨 관련이 있는지요? 철학의 아포리아들을 여기저기서 그러모아 '시차'라는 동일한 명칭만 갖다 붙이면. 저절로 동일한 것이 된답니까?
사실 그가 '시차적 관점'이라 부른 사유의 태도 역시 이미 아도르노가 했던 얘기입니다.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그건 그렇고, "학문적 엄밀성이나 성실성"을 가진 분 좀 소개시켜 주세요. 도대체 본 적이 없어서... 혹시 본인이 그렇다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keno21님의 댓글
keno21 작성일
좀 답답합니다. 선생님은 벤야민을 인용하여 자신의 논지를 펴면서도 벤야민을 꼼꼼히 읽고 있지 않습니다. 결국 선생님의 주장은 벤야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말지요. 벤야민은 분명 "오늘날 신학은 ... 되었다"라는 문장을 쓰고 있습니다. 즉 벤야민이 지적하는 신학의 모습은 벤야민 당대의 정황 속에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문장을 무시하시니까 초역사적 보편적 주장, 즉 "유토피아의 작동이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된다"가 가능해지는 것이죠. 신학은 물론 '혁명적 메시아주의'입니다. 즉 신적인 개입을 통해 전면적인 혁명적 상황이 발생할 것에 대한 믿음이죠. 이것은 글자 그대로의 신학입니다. 또한 유대교 신학과 기독교신학은 이 믿음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 신학이 있고 저 신학이 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세속화 이후 비과학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이 추하게 변한 이유는 유럽 고유의 사회적 전개의 결과입니다. 신학이 숨겨져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유럽적 정황에서 전술적인 선택일 뿐입니다.
또 선생님의 "사적 유물론이 사실은 세속적 형태의 종교, 세속적 메시아주의였다는 깨달음"은 뒤늦어도 한참 뒤늦은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가 기독교적 메시아주의의 변형이라는 주장의 역사는 거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합니다. 이미 공산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의 구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니까요.
(좀 길지만 인용하겠습니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그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에리히 프롬도 마르크스주의를 "19세기의 언어로 쓰인 옛 메시아사상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지젝이 "오늘날에는 사적유물론이 난쟁이"라는 주장 역시 후기 산업사회의 탈세속화라는 맥락과 관계가 있지요. 즉 자본주의의 새로운 전개 속에서 신학과 사적유물론의 지위가 뒤바뀌었다는 말이지요. 이는 아마도 20세기 초 산업자본주의가 과학적 합리주의와 친화적이라면, 오늘날의 후기자본주의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종교적 속성을 드러내며(자본주의가 일종의 종교라는 주장은 벤야민의 날카로운 통찰이기도 하였죠), 19세기 낭만주의 철학과 유사한 이데올로기와 친화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평가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지금껏 참아왔던 "유토피아의 작동이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된다"는 선생님의 자유주의적이며 황당한 주장에 대한 비판에 돌입하고자 합니다. 사실 그냥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이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니까요. 그래서 충분히 쉬고 호흡을 고르려 합니다. 좀 기다려 주십시오. 혹시 선생님께서 불편하시고 귀찮으시면 그 얘긴 필요없다고 말씀해주십시오. 그럼 저는 조용히 침묵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핝 주장에 대한 비판은 제 작업의 본령이기도 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여기가 아닌 다른 지면 혹은 방식으로 말할 수 밖에 없겠지만요. 안녕히 주무십시오.
keno21님의 댓글
keno21 작성일
이거 참 댓글은 수정이 안 되네요. 이 말씀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사적유물론'은 '신학'에 불과했다는 선생님의 늦어도 한참 늦은 인식 말입니다. 선생님은 그렇다 쳐도 지젝도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은 라캉의 '행위'라는 개념과 직접적 관계가 있습니다. 이 얘기도 원하시면 다음에 하겠습니다.
tkabyss님의 댓글
tkabyss 작성일
이런 이런... 상상계, 상징계 운운한 사람 여기 나왔습니다. 여기, 하루만에 전쟁터가 되어버렸네요. 나오라고 하셨으니 일단은 나갑니다만, 괜한 주제 넘는 짓은 말겠습니다. 뭐, 제가 한말이나 주워담고 가지요. 참 나 이거원... 라캉의 용어 사용면에서 다른 사람 댓글 거들다가 이거 거덜나게 생겼네요. 지고 이기는 것, 우월감을 느끼고 쪽팔림을 느끼는 것이, 이런 말싸움에 혹 있다면, 지고 쪽팔리면서 배우고 가겠다는 생각으로 지껄여 봐야겠습니다.
'용어를 잘못 사용하고 계시다'라는 댓글을 달았는데, '용어는 연장일 뿐이니, 니 사유나 잘하세요'라고 대답이 돌아오면 뭐 할말은 없습니다. 그 연장이 내 것도 아니고, 빌린 것도 아니니 뭔 말을 더하겠습니까? 진중권씨께서 망치를 갖고 노를 젓건 말건 나랑 뭔 상관이 있겠습니까?
'과학'이란 용어 가지고 댓글을 단 것은 제가 나댄 것이 맞습니다. 전체적인 논지에서 쓴 '과학'이라는 용어는 어디까지나 진중권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일반적인 의미에서 과학을 말하는 것일테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 부분입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합리적 열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움직이는 열정이다(지젝은 이를 프로이트-라캉의 '충동'으로 해석한다)' 라캉이 기존의 과학을 말할 때, 주체가 분열된 자신을 억지로 꿰매서 만든 것이 과학이라고 비판을 하고, keno21님이 말씀하신데로, 충동을 말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과학이다, 라고 하지요. 라깡 자신이 과학에 대해서 재정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님의 글에서 보면, 결국 '과학 <-> 열정 = 충동' 이러한 도식이 된다는 거잖아요? 여기서 문제가 생겨버립니다. 진중권님이야 '아 그 '과학'은 그냥 일반적으로 쓴 과학인데?'라고 대답하면 상관없으시겠다만, 라깡이 과학을 재정의하고, 그것을 데카르트적 주체와 분열된 주체를 설명하는데 쓰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저로써는 헷갈릴 수 밖에 없지요. 아니면 아예 차라리 '(지젝은 이를 프로이트-라캉의 '충동'으로 해석한다)'라는 부분이 없었다면 상관이 없을텐데요. 그런데 이 부분은 그냥 그냥 넘어가면 그만이겠지요.
tkabyss님의 댓글
tkabyss 작성일
이전에 쓰신 <예쁘면 다 괜찮아?>라는 글에서 나온 상상계, 상징계라는 용어를 걸고 넘어졌던 것을 말해보지요. 사실 그 글을 얼마전에 읽었을 때는, 어라, 저게 아닌데... 하고 그냥 넘어갔던 부분이었지요. 그때 댓글로 지껄였으면 또 훈고학자될 뻔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훈고학자로 낙인찍힌 상태니 흉내라도 내야겠지요?
"현대인의 의식(혹은 무의식) 속에서 상징계는 축소되고 상상계가 비대해지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유아는 거울을 통해 실재계에서 상상계로 입장하고, 이어서 상징계로 이행하면서 성장을 완료한다."
"하지만 산업 이후 사회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상징계에서 상상계로 되돌아가는 퇴행이다."
정신분석이 지 존재감을 드러내는 분야는 크게 세가지 정도인데, 이처럼 사회문화, 정치적인 현상들을 '라깡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그 중 하나입니다. 지젝이 잘하는 거고,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가 하는 일이고, 그 글에서 진중권님께서도 하신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철학, 또 다른 하나는 임상 이론이지요.) 아, 자기 사유를 하시는 분이셨지요. 지젝이랑 묶어드려서 죄송합니다.
1. 먼저 그 글에서 님이 라캉의 것이라고 제시한 '실재계 -> 상상계 -> 상징계'를 볼께요.
실재, 상상계, 상징계는 제시하신 것처럼 거울단계와 오이디푸스기를 거치면서 소위 정상적인 주체로 탄생한다고 했으니, 저 말이 굳이 이상하다고 말할 것은 없죠. 그런데 문제는 저 도식을 '시간에 기초한 계기성'이라는 측면에서 제시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는 거죠. 라깡은 저러한 단계를 밝히면서(라깡이 직접적으로 저 이야기를 한 부분은 못봤지만 그의 말을 정리하면 저 도식이 나오죠) 저것이 '시간적인 계기'가 아닌 '논리적인 계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글에서는 '유미주의(이미지, 그래서 상상계?)'에서 '이성주의(텍스트, 언어, 그래서 상징계?)'를 일정한 역사성을 가진 발전 단계(진화, 퇴행)로 쓰시던데, '논리적인 계기' 그래서 '공시성(그래서 라깡은 저것을 '삼위체'라고 하잖아요)'을 가지는 저 단계, 저 세가지와는 뭔가가 안맞잖아요?
2. 더군다나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이행이 님이 말씀하신데로 '완성'은 아닐 뿐더러, (라깡적 용어로 환유적으로 쓰셨지만) '진화'도 아닙니다. 유아가 상징계로 진입할 때는 물론 어머니와의 이자적인 관계에서, 즉, 어머니의 환유의 대상에서 '탈출시켜' 주체로서 탄생하게 만드는 기능, 즉 긍정적인 기능이 있지만, 동시에 '상징적 거세'를 적용하여 '결여'를 남기는 부정적인 기능도 있으니까요.
3. 또한 상징적인 것이 '완성'이 아닌 것은, 라깡의 후기 주장에 나와있는데로, 그리고 지젝이 옛날부터 말한데로, 상징적인 것(상징계)는 실재를 감추기 위해 조잡하게 형성된 구조, 끊임없이 움직이는 불완전한 체계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오이디푸스를 거쳐 상징계가 작용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상징계가 가진 그 '빈틈'을 발견하게 되고, 그 빈틈에서는 실재가 보이게 되죠.
그런데 라깡은 '진리'는 상징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있다고 합니다. 실재가 상징계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상징계를 중요시한 진중권님의 인용은 전혀 라깡적이지 않은 것 아닙니까?
4. 상징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이 마치 따로 작용하는냥 쓰신 것도 제가 아는 것과 달라서 거슬립니다.
아까도 말했듯,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 실재는 함께 작용합니다. 신은 하나인데,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삼위일체론'의 기본인 것처럼, 라캉도 어떠한 무엇은 개인에게 저 세가지의 모습(삼위체, triade)과 작용으로 드러난다고 말하지요. 오이디푸스기에서 어머니의 작용이 상상적인 것, 아버지의 작용이 상징적인 것으로만 드러난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받습니다. 실제로 이 오이디푸스기에서 아버지는 상상계, 상상계, 실재, 이 세가지 모습 모두로 드러납니다. 딴 얘기를 좀 했지만 어쨌든,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퇴행'은 라깡을 인용하셨지만 전혀 라깡적인 것이 아닙니다. 상징계로서의 작용이 부재하는 정신병을 제외하고는 인간은 누구나 이 세가지 작용을 모두 받습니다.
이는, '이미지'와 '텍스트, 언어'라는 개념으로 상상계와 상징계를 지나치게 단순화 시키셨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할말이여 만들면 더 있지만 이만 쓸랍니다. 나오라고 해서 나온 값은 했으면 하네요.
tkabyss님의 댓글
tkabyss 작성일
아아... 이것 참... 글 읽다가 "이거 인용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라고 말도 못합니까? 님을 깔려고 일부러 꼬투리 잡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은 님께서 인용한 부분을 문제삼았던 거니까, 주제 파악도 안하고 '깠다'고 하신 부분은 해당 안된다고 생각해도 될테고 / 상상계, 상징계 이야기는 위에 썼으니까 뭐라고 대답이 나올테고 / 스파이더맨이 된 것은 할말이 없네요. '모든 사람이 당신의 개념으로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라고 한다면 이거 뭐라고 해야 변명이 되는 겁니까? /
그리고 현실을 얼마나 잘 설명해 내느냐가 진중권님의 일종의 이론, 개념 이해나 사용의 원칙이라면, 저의 원칙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공부는 짧지만 라캉 이론을 기본으로 삼아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니까요. 그의 이론이 현실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그래서 써먹기 좋다고 일단 결론을 내린 상태니까요.
'기초하는 것'과 '훈고학'의 차이가, 개념을 연장으로 삼을 수 있느냐, '사용' 능력이나 가능성이 있느냐에 있는 것이면 해보면 그만 아닙니까? <예쁘면 다 괜찮아?>에서 문제 삼으신 현상을 제가 읽자면, 미모가 지상적임이라는 '상징적인 것' 혹은 '요구'를 문제 삼겠습니다. 일종의 사회적인 현상이 개인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꼭 상상적인 것이라고도 상징적인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굳이 그 현상에 대한 반응을 이야기 하지면, '요구'차원에서 말하던가, '충동'을 끌어들이기 위해 '대상 a'를 말해야 겠지요. 아니면 '향유'를 끌어들여서 '미모 지상주의'에서 나타나는 '남성의 향유방식'과 그에 대한 '여성의 향유방식'을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중에서 그 글에서 나타난 님의 주장으로 가지는 않겠네요.
솔직히 말해서, 유미적인 것, 이미지를 상상계라고 말하고, 이성적인 것, 텍스트를 상징계라고 말해서 '상징계에서 상상계로의 퇴행'이라고 말한 것은 열라 코미디입니다.
정신분석학라는 '연장'의 경우, 이 연장은 사용 용도가 '소외'에서 벗어나 개인을 욕망하는 주체(욕망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라깡은 누가뭐래도 자신은 그러한 용도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발전시켰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상상계와 상징계는 각각, '자아'라는 이미지와, '상징적 거세'라는 작용 때문에 개인을 소외시키죠. (그래서 일단 상징계를 일종의 해결책, 완성, 진화로 제시했던 님의 글도 한번 더 코미디가 되는 겁니다) 라깡이나 지젝은 그 해결점을 상징계의 벌어진 틈, 즉, 실재에서 찾습니다.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에서 지젝이 '행위'라고 말하는 것과, 라깡이 진리는 실재(계)에 있다고 하고, 또한 '불확실한 것에 걸기'라는 식으로 상징계의 벌어진 틈, 실재가 드러나는 틈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이야기이지요.
길게 썼지만, 다시말하면, '미모 지상주의'에 대한 개탄이라 하시라고, 라깡이 상상계와 상징계 개념을 만든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 놓고는 연장 운운하시다니요.
tkabyss님의 댓글
tkabyss 작성일
지젝이나 라깡은 살짝 언급하긴 했지만, 이 글이 주장하는 바는 참으로 (지젝이 말하는) 정신분석학이라는 '연장'의 방향과 동일합니다. 과학이 닿지 못하는 열정을 강조한다는 것은, 상징계의 틈새로서의 실재 그것에 대한 행위를 강조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이건 재밌는 부분이네요. 정작 정신분석 용어는 쓰지 않은 글이 정신분석학스러우니까요. 잠시 딴얘기.
daimon100님의 댓글
daimon100 작성일
오랜만에 재미있는 글을 읽기는 했는데, 최근에 있었던 저자 자신이 참여한 여러 논쟁들의 콘텍스트 때문인지 심난하네요. 벤야민과 지젝에 대한 이해가 좋긴 한데 좌파라는 용어의 쓰임이 도식적이라는 느낌도 듭니다. 그리고 너무 이론적인 용어들 때문에 과연 몇명의 독자들이나 이 글이 이해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덧글들의 누구 이론에 대한 해석에 누가 옳으니 그르니 하는 논쟁들은 정말 소모적이라고 봅니다. 도대체 벤야민이나 라깡의 이론을 누가 정확하게 이해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지 않을까요? 충동이 drive를 말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왜 이런 용어들을 가지고 왈가불가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좌파지식인들의 남의 나라 이론 오독과 정독을 왈가불가만큼 유치한 일은 없다고 봅니다. 각자 읽고 자신이 해석한 만큼 소화한 만큼 쓰면 되는 겁니다. 자뭇 라깡 전공자느니, 들뢰즈 전공자느니 하면서 끝없이 용어해석과 체계분석만을 문제삼는 이들이 더 문제라고 봅니다. 벤야민의 역사유물론문제는 수많은 논문들과 책에서 이미 다루어지고 있고, 그 해석들 역시 여러갈래입니다. 역사유물론과 신학이라는 벤야민의 공통주제와 라깡의 연결이 다소 문제가 되는 것이지, 불필요한 용어싸움으로 글을 곡해하는 것이 더 문제라고 봅니다. 제발, 외국이론들을 전가의 보도로 흔드는 것이나 그 이론들을 가지고 치고 박고 싸우지 맙시다. 부끄럽습니다.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keno 21/
1940년대에 신학이 낡은 것이 되었다구요? 신학적 사유가 유럽인의 의식에서 낡은 것이 된 것은 훨씬 그 이 전의 일입니다. 바로크가 끝나갈 무렵에 시작되었고, 니체는 한참 뒤늦게 거기에 사망선고를 내린 거죠. 님의 해석은 솔직히 제 기를 막히게 합니다. 또 기독교와 유태교나 그게 그거라구요? 기독교에서 메시야는 이미 이 땅에 왔다 가셨고, 유태교는 상황이 전혀 다르지요. 그것이 유태교의 메시야주의를 기독교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 님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신 겁니다. 벤야민이 말한 "오늘날"이 무슨 1940년 5월 26일 쯤을 가리키는 걸로 읽으신 모양이지요. 1940년대 상황과 관련이 있는 정황이라면, 아마도 현실사회주의의 긍정적 유토피아문학에 대한 깊은 회의가 담겨 는 정도겠지요.
유토피아는 작동하되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게 베냐민의 생각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긍정적 유토피아에서 부정적 유토피아로의 전환이라고 할까? 그런 태도는 당연히 아도르노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되지요. (가령 부정의 변증법으로의 전환) 나중에 아도르노는 유토피아를 불꽃놀이의 아파리시옹이라는 알레고리로 설명하게 되지요. 이렇게 다 사상사적 맥락이 있는 겁니다. 베냐민이 사실 탈근대 철학자들이 주장을 선취했다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지요.
님은 그야말로 해괴한 독법을 들고나와 자신의 것만이 옳다고 강변하고 계십니다. 그런 주장은 나중에 토론이 끝난 다음에 결산을 할 때나 하세요. 게다가 님이 결정적으로 오해하는 것은 베냐민의 그 구절은 '알레고리'라는 겁니다. 그것은 베냐민 특유의 알레고리적 사유의 문학적 표현이지요. 그런데 님은 그것을 갖다가 교조를 만들어버리는군요. 그나마도 엉터리 해서에 기초하여....
kdpak님의 댓글
kdpak 작성일
시나브로의 유토피아의 이상적 실현의 무한적 시나브로하게 접근의 발걸음이 세상의 변화의 흐름의 결과가 민중에 대한 정부의 민중을 제일 잘아는 부서의 국가보안법개입의 현존의 주도에도 있었슴에 학문의 순수한 발전의 아쉬움이란 그것또한 세월이 간과하면서 답변해 주겠죠,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내 차, "미모중심의 사회에 개탄이나 하라고..." 그 글을 썼다구요? 글의 주제파악조차 못하는 분들이 말버릇은 지나치게 유식하신 것 같아요. 미모중심의 사회에 개탄하기 위해서 쓴 게 아니라,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더불어,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사회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불가피한 맥락이 존재한다는 게 그 글의 주제입니다. 그렇다면 그게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 추적하는 게 요즘 제가 하는 작업이구요.
남 씹을 시간에 라캉 데려다가 미모중심사회 한탄조차 못하는 님들의 무정자증이나 반성하세요. 님들이야 고작 라캉 데려다놓고 포스가 쩐다고 감탄이나 하는지 몰라도, 전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옛날부터 공공연히 말하지만, 저는 정신분석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상징계/실재계/상상계의 구별이 묘하게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미지 분석과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그 개념들 도입할 때에 그 밑에 깔린 불필요한 전제들까지 잔뜩 끌어들여야 하는 부담이 있어서 외려 그 부분을 잘라내고 부분적 도입을 시도하는 중입니다.
님들은 실재계/상상계/상징계의 구별을 공시적인 것으로만 보겠지만, 제 가설은 그것을 미디어사와 연동시켜 각각의 계의 발생을 통시적으로 볼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개체발생과 계통발생 사이의 평행에 주목하는 거죠. 가령 그리스 문화가 이미지에서 텍스트로 변화할 때, 그리스인들의 의식은 신화적 사유에서 철학적 사유로 넘어갔지요. 하지만 다시 최근 이미지가 복귀하면서 '현대인에게서 의식의 재구조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게 제 가설입니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겠지요.
텍스트 문화의 도입이 서사적 의식을 역사적 의식으로 이끌었다면 이미지 문화이 부활은 다시 역사적 의식을 밀어내고 서사적 의식을 부르고 있지요. (이번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샌델도 '인간은 삶에 서사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을 자기 공동체주의의 근거로 제시하더군요 ) 제 가설은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텍스트와 이미지의 혼합, 즉 역사적 의식과 서사적 의식의 묘한 혼합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혼합된 의식의 특성을 드려내는 것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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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 모든 얘기를 할 수는 없고, 곧 디지털 이미지에 관한 책을 낼 테니, 궁금하시면 참고하세요. 라깡 자기 혼자 아는 척하지 하지 마세요. 무슨 라깡이 방입니까? 혼자서 전세 내게.... 남 글 꼬투리 잡아서 자기 잘난 척 하는 계기로 삼는 버릇에서 벗어나세요. 본인의 발전에 하나도 도움 안 됩니다. 생산적으로 글을 쓰세요. 일단 초보자시니까, 라깡 데려다가 미모중심사회 한탄하는 연습부터 시작해 보세요. 써먹는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님들이야말로 한국 인문학의 고질병이 무엇인지 그 몸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학문을 하는 기본기부터 좀 갖추세요. 사유의 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니, 책 한 권 읽고 나면 사람들이 다 저 모양이 돼요. 책 한 권 읽고 내 잘났다, 니 잘났다,틴에이저 철학자 ....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아, 잘난 척 한 마디 더. 지젝의 책에서 '라쇼몽' 분석한 글이 있는데, 그것도 몇년 전에 제가 이 지면에 썼던 것과 내용이 똑같더군요. 중요한 것은 '사유'입니다.
ironsea님의 댓글
ironsea 작성일
유토피아적 전망을 기반으로 행동하되, 그것이 드러나진 않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회의 정치적인 낙후성이 유토피아적 전망의 과잉에 기인할까요? 반대로 유토피아적 전망의 과소에 기인하지 않나요? 예를 들어 '뭐... 세상이 원래 그렇지.', '정치하는 새끼들은 다 똑같지.' 이런 말로 대표되는 유토피아적 전망의 일반적인 부재가 바로 한국 사회에서 좌파적 세력이 생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 전망을 명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절실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그 전망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것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소통을 통해 공유된 전망이라는 것은 확실히 중요하지 않을까요.
postideo님의 댓글
postideo 작성일
우왕 중거니 형이다~~
keno21님의 댓글
keno21 작성일
글을 꼼꼼히 읽지 않으시는군요. 좋습니다. "1940년대'어간이라는 나의 표현은 실수입니다. 1940년이 무슨 해인지는 아시죠.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를 완성한 시점입니다. 그런대 선생님은 1940년이라는 순간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시지 않을 텐데도 계속 "1940년대"운운하시는 군요. 저는 또한 신학이 추하게 된 이유가 "세속화 과정"의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이 과정의 결과가 선생님 말대로 "바로크가 끝나갈 무렵"일 수도 있고 그 이전으로 소급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벤야민의 전시대를 관통했습니다. 이 시대의 진보적인 이론들이 반신앙,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띤 이유도 여기에 있구요. 저는 신학이 추하게 된 것은 이러한 특수한 유럽적 역사전개의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이 감춰져야 한다는 주장은 보편화 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벤야민을 그런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기본적인 텍스트 읽기도 부족한 아전인수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중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주장을 반복했습니다. 그런대 선생님은 계속 1940년대 운운하시는 군요. 참 소통이 어렵습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반박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신학은 ... 되었다"는 문장을 통시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하하 기독교에서는 메시아가 왔다갔다구요? 유대교 신앙의 토대인 성서는 <히브리성서>입니다. 기독교는 이를 정전으로 받아들여 <구약성서>라고 합니다. 물론 이 구약성서는 <신약성서>, 특히 4복음서의 빛에서 재해석됩니다. 그렇다고 <히브리성서>의 의미가 전혀 변질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히브리성서>, 혹은 <구약성서> 연구에 관한한 유대교 신학과 기독교신학은 거의 경계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성서해석의 기본관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은 유대교신앙에 입각해서 세워진 대학입니다. 벤야민의 친우인 숄렘도 여기 출신이지요. 이 대학은 기독교 구약성서연구에 관한 한 세계적으로 3대 명문 중 하나입니다. 한국에서 히브리대학에서 <히브리성서>를 연구하고 개신교신학교에서 구약성서 강의하는 사람 여럿있습니다.
선생님은 고등학생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글을 쓰신다고 하셨는데, 아시는 수준도 그정도 같습니다. 대개 확인 되지 않은 상식을 바탕으로 주장하시네요. 니체 얘기도 그랗구요.
아무튼 좀 기다리십시오. 더 좋은 말씀 해드리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워낙 일이 많아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도 바쁘실테니까 여기에만 신경쓰실 순 없으실 거고, 제가 무슨 글을 올릴지 궁금하시면, 제가 올린 것을 선생님께서 쉽게 확인하실 수 있는 방밥을 알려주십시오.
keno21님의 댓글
keno21 작성일
제 글의 여섯번째 문장 "이 과정의 결과가"가 아니라 "이 과정의 시작이"가 맞습니다. 수정이 안 되니 영 불편하네요.
postideo님의 댓글
postideo 작성일
Keno21/ 그래서 기독교에서 메시아가 왔다 갔다는 주장이 잘못된건가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지 않습니까?
keno21님의 댓글
keno21 작성일
기독교신학에서 메시아는 어디로 영영 가버린 게 아니라 성령이라는 형식으로 현존합니다. 그래서 매시대 상황에서 메시아 사건 혹은 예수 사건이 발생하지요. 1970년대 한국민중신학이 전태일 사건을 예수사건이라 말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keno21님의 댓글
keno21 작성일
리는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믿음 안에서 메시아의 도래를 열망하는 유대교신학과 동일한 구조입니다. 단 핵심적인 차이는 하느님의 표상으로서의 메사아 혹은 하느님 자신이 예술하는 한 특수한 인간 존재 안에서 인간이 되었다는 성육신 신학이지요. 이 성육신 신학에 대한 해석은 이것만으로도 도서관 한 채를 거뜬히 채울 정도로 복잡다기하지만 기독교신학은 이러한 성육신신학의 단초가 이미 히브리성서 안에 잉태되고 있었다고 봅니다. 이거이 고대종교의 제왕신학, 즉 왕이 신 자신이거나 신의 아들 혹은 표상이라는 신학과 다른 점은 예수가 지배자가 아니라 피지배자로서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지금부터 저는 일주일간 사라집니다.
keno21님의 댓글
keno21 작성일
예술하는? 예수라는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결국 논의를 아멘 할렐루야로 만들어 버리시는군요. 1940년이면, 히틀러-스탈린 동맹이라든지, 스탈린주의로 실현된 유토피아라든지.. 베냐민이 긍정적 유토피아에서 등을 돌린 구체적 계기를 제시할 줄 알았어요. 기껏 한다는 얘기가 1940년대쯤엔 유럽에서 신학은 낡은 것이 되었다.... 뭐, 이런 수준이니... 됐습니다. 그만 합시다. 논쟁도 웬만큼 수준이 맞아야지요.
jiny0819님의 댓글
jiny0819 작성일
그런 것일까요~좋은 일입니다.
얼마전에 서울이 93년 이래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더 나은 세상을 믿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음. 착하게 살아야죠 ㅎㅎㅎ;;
kivo69님의 댓글
kivo69 작성일
오랜만에 진중권 선생님의 좋은 글을 읽었는데 논쟁이 엉뚱한 곳으로 번지는 듯 하여 아쉽군요. 제가 읽은 메시지는 이 글의 핵심 메시지는 <우리는 결코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없으나...세속 종교적 신앙,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비합리적 열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소위 <좌파>들은 <주사파>에 대해 그러한 비합리적 열정이 부족함을 꼬집은 글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글에 대한 논쟁은 텍스트를 텍스트의 내적 맥락에서(만) 읽으려고 하는 분들과, 자신의 참여라는 큰 틀 내에서 텍스트의 내용을 끌어와 구사하는 진중권 선생님의 입장의 차이로 보이는군요. 어떤 글에 대한 <이해>라는 것이 참으로 다양한 수준의 층위가 있다는 걸 생각하게 해 주는 논쟁입니다. 다만, 제가 진중권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은 왜 우리는 비합리적이고 실현불가능한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열정>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오직 "열정" 뿐이라면 국가보안법땜에 <터키인형>으로 행동하는 주사파와 그럼 뭐가 다른가요?
- 물론 위 글의 취지는 <자기를 움직이는 열정>이 부족한 몇몇 좌파 이론가들을 겨냥한 것임은 알겠지만, 신학은 때로는 타인뿐 아니라 <자기를 심판하는 기준>이 되어야 하지는 않을까요?
- 사족으로 덧붙이면 <무상급식>은 어떤 정치적 효과를 낳은 훌륭한 촉매 역할은 했고, 그러한 촉매를 더 많이 발굴하는 데 찬성하지만, 그 자체는 별로 좋은 촉매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것>의 예로 촉매를 든 것은 대부분의 화학자(은유에 능숙하지 않은)라면 놀라자빠질 문장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유토피아는, 실재가 아닌 상징계에 <존재>할지는 모르지만, 촉매는 실재계에도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 마지막으로 <열정>은 가고 <이론>만 남은, 이 세태를 한탄하는 선생님의 글이, 오히려 그런 관점에서 비판을 받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만큼을 이해할 수 있는가봅니다.
syhhys님의 댓글
syhhys 작성일
사유훈련 저마다 잘되있다 보입니다. 진중권씨 전매 아닐뿐더러
syhhys님의 댓글
syhhys 작성일
더우기, 소통의 기본은 '개인사유체계' 포함한 소통상대 존중입니다.
syhhys님의 댓글
syhhys 작성일
leftgirl님의 댓글
leftgirl 작성일
진중권씨, 이런 식으로 자신의 깊이 드러낼 줄 알았다. 진씨는 우선 이런 지면에서 익명의 독자들과 진지하고 성실하게 토론에 임하는 태도부터 다시 배웠으면 좋겠다. 상대가 안 되느니, 더 배우고 오라느니, 책 한 권 읽고 다 아는 척한다느니.. (사실, 책 한 권 읽고 저런 사유 해낼 수 있는 사람 있음 만나보고 싶다. 천재가 아닌가 싶어서.) 그리고 한 가지 궁금증.. 왜 굳이 자신이 탐탁해하지 않는 정신분석학 개념을 끌어다 써서 이런 재앙을 자초하는 걸까? 탐탁해하지 않으니 깊이 공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깊이 공부를 안 했으니 자꾸 오류가 나는 거 아닌가. 왜 스스로 마땅치 않아 하는 이론, 개념을 도구로 자기 주장 뒷받침하려는지 모르겠다. 그게 권위 있어 보여서? 내 보기에도 상징계, 상상계 개념은 완전 오해에 터해서 마구 남용하고 있더구만... 진짜 실망이다. 오래도록 팬이었는데..
syhhys님의 댓글
syhhys 작성일
진중권씨는 매우 저널한 인문학자로써, '다른 사유방식' 가지고 있는 상대 이해하며 토론과소통 이끌어 가는것이 전문 프로 학자로서 소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syhhys님의 댓글
syhhys 작성일
자기흉보는 아들과 며느리 대화 엳듣고는 다짜고짜 나타나서 혼내는 시아버지처럼 느닷없이 대화방 등장 하셔서 각을세우고는 소통을 끝장으로 몰고가시는것은 대한민국 대표적 소장 인문예술 평론가 태도 아니라 생각됩니다.
syhhys님의 댓글
syhhys 작성일
-- 20세기와 21세기 초기를 대표하고 있는 보노(bono)가 이끄는 아일랜드 록밴드 u2 가 2009년 결산 최고의 흥행 대중 음악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작년한해동안 대대적 전미투어 벌인 이들은 원화환산 11만원 해당하는 티켓을 무려1천만장 넘게 셀(sell) 한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결코 대중적인 가벼운 음악이 아닌 예술과 정치사회적 테마로 활동하는 아티스트에게 얼마나 놀라운 흥행성적인가 생각하게됩니다. 더우기 이들은 엄밀이말해 전성기를 넘긴 아티 이기에 더욱 놀라움을 느끼게됩니다. youtube 통해서 이들의 전성기 발매된 사회통찰 깊게담긴 최고의 앨범 joshua tree 감상하시고 더불어 전미투어 상황 확인하시는 시간가지시기 바랍니다.
syhhys님의 댓글
syhhys 작성일
facebook. name; john sy syhhyssyh61@yahoo.com
nexus6님의 댓글
nexus6 작성일
잘 썼다...CJK...어제 오늘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를 읽고 있었거든...
당대의 스타일리쉬한 글들에서 재료를 추출하여 버무리는 능력이 빼어나^^;
계속 냉소적이고 강인한 지성적 좌파로 네 역할에 충실하렴...
미학오디세이 개정판도 사서 읽었는데...오리지널 1권에 있던 머리말과 달라져서 걱정했었다(파충류 같은 좃선일보 운운한 글이 어찌나 시원했었던지^^). 시간이 너의 예기를 무디게 했거나...엉큼한 이해타산이 너를 속물화시키는게 아닌가 하고 말야. CJK 우리의 페르소나! 언젠가 절정의 순간에 체처럼, M.R.킹처럼 산화하기를...자랑스러운 내 정신의 벗...^^;
hj0084님의 댓글
hj0084 작성일
angelusnov라는 대명을 사용하는 분이 진중권 씨 본인인가 보군요. 저도 진중권 님의 기사에 댓글을 달은 사람입니다만, 아직도 이 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른바 좌파의 문제에 대해 진중권 님의 생각을 쓰신 것인지, 아니면, 한국 정치의 현실에서 대중운동과 진보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쓰신 것인지 하나도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이른바 좌파의 문제에 대해 쓴 것이라면 왜 그것의 해법은 어디에 제시되었습니까? 또한 대중운동과 진보정치의 방향성에 쓴 것이라면 각각의 현실에 대해 진중권님의 분석과 이해는 어떤 것인지, 즉 문제인식의 출발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출발점이 없는 논의이므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없을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다양한 인용과 책읽기의 내공을 보여주긴 했으되, 결론이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문화평론가라는 직함으로 대안까지 제시해야 하는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 제기는 곧 대안의 방향성 정도는 제기해 주어야 읽는 사람이 당신의 생각이 무엇인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님의 기사에 대해 너무 어려운 얘기를 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댓글을 달았습니다만, 고졸 이상의 학력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반론만 있더군요. 만약 저라면 유물론적 신학이 2010년 한국의 사회현실에서 진보라는 틀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어떤 점이 유용한 것이며, 현실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되는지를 다시 한번 알려주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주제넘게 잘 모르는 내용에 대해 이런 저런 비판을 가하는 것 보다 당신의 글쓰기가 무엇을 겨냥하고 어떤 현실에서 출발한 것인지를 알려주기 바랍니다.
offname님의 댓글
offname 작성일
저 위에 솜사탕운운한 사람인데, coldplay37님의 "그럼 진정한 한국인의 글이 되려면 한국 사상가의 글만 인용해서 써야 합니까?" 이런 강남의 싸모님같은 싼티나는 리플은 먼가. 아 수준 참.
offname님의 댓글
offname 작성일
저는 외국의 지식으로 한국의 상황을 타개하거나 분석해보려는 시도를 '서도동기론'적 한계, 즉 오리엔탈리즘과 콜로니얼리즘적 사유의 혼합적 범람에 우려하여 언급한거에요. 그렇게 극단적 교과서 읽기를 하면 빈칸에 알맞은 답을 넣는 인생밖에 더 살까 싶어서 혀를 끌끌 차게 되지 않겠소?
offname님의 댓글
offname 작성일
그리고 진중권님, 저는 당신의 반박글에 나오는 상징계와 상상계간의 현상에 관한 지금의 논지대로라면 오히려 상징계로 회귀하는 현상을 더 관심갖고 보는 입장의 사람입니다. 님이 우려하는 것과는 반대로 현상을 관찰하기에는 아무래도 상상계의 버징이 매력적인 사운드로 들리거든요.
offname님의 댓글
offname 작성일
그 것 또한 흥미로운 모순(님의 글중)임에는 동의합니다.
offname님의 댓글
offname 작성일
위에 글 '상징계로 회귀하는 현상->상상계로 회귀하는 현상'으로 정정합니다
offname님의 댓글
offname 작성일
한 때의 사회주의가 유일하게 잘 한짓은 예배당을 없앤것인데.
그것도 결국 다시 회귀하지 않소, 주사파가 없었다면 대신하는 어떤 '침파'정도는
또 있었을 것이고. 국가보안법 근데, 그거 아직도 안없어진건가? 방법은 하나, 국가를 없애면 따라서 없어질 걸. 쯧쯧
hardcase님의 댓글
hardcase 작성일
진중권님 왜 저렇게까지 버럭버럭 성질을 내시는지 잘 이해가 안 되네요..;;; 많은 분들과 논쟁하시느라 그간 고생이 많으셨던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저분들에게 저렇게 날카롭게 반응하실 것까지야...;;; 아무리봐도 진중권님이 말씀하시는 틴에이저 철학자는 아닌 것 같은데요;;; ㅡㅡ;;;
streets85님의 댓글
streets85 작성일
왜 진중권씬 독자가 진지하게 단 댓글을 제멋대로 읽어낼까요.
성격 운운하지 말라지만, 진짜 성격 드러나는 건 어쩔 수 없나봅니다.
상대방은 '자신이 읽은 대목'을 까보이며 개념의 합의를 시도하는데 진중권은 그냥 "도구는 쓰기나름"이라고 해버리고는 상대방을 훈고학자니, 지식이 짧니 어쩌니 인격모독해대는 거, 보는 나는 재밌지만 난 이 방식이 결국 우리나라 대중지식인들 토론 발전에 도움 안 된다고 봄. 진중권식 더러운 소통법에 질려서 강준만 같은 성실한 지식인이 담배니 커피니 하는 글만 쓰잖습니까. 요즘 같이 별별 인간들이 지식인입네 행세할 때 제일 그리운 사람인데. ㄲㄲ
무엇보다 그 자신 밝힌 바 "관심 없는" 분과면 그냥 겸손하고 진지하게 임하면 될 것이지, 말이 안 통하는 논쟁을 스스로 붙여놓고는 "수준이 안 맞"네 어쩌네 하는 게 얼마나 흉한지 아는 겁니까.
당신이 진 거요 ㄲㄲ
근데 글은 재밌었어. 그냥 당신은 이렇게 적당히 지적이면서 우리 즐겁게 해주면 됨. 나 웃기라고 평생 기도해주겠음. 솔직히 없으면 아쉬우니까.
*근데 저 위에 CJK 운운하는 사람은 진중권 더러 요절하란 얘긴가요?ㅋ
realyhh님의 댓글
realyhh 작성일
흠.. 제 학식이 많이 부족해서인지 이곳에서 벌여지고 있는 담론에 대한 이해를 잘 하지 못하겠습니다. 지젝이니, 라캉이니,, 한때 철학에 관심을 갖고 들뢰즈나 여러 책을 읽은 기억은 있지만, 아직도 그들의 용어를 잘 이해하진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벌여지고 있는 담론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구심이 듭니다. 저자가 글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말은 있는데, 그에 대한 논쟁이 아닌, 차용한 어휘나 개념에 대한 논쟁이 계속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그러한 댓글도 무슨말을 하시는건지 잘모르겠구요.. 가서 공부나 더하고 오라고 하면 그러하겠습니다..
khk386님의 댓글
khk386 작성일
벤야민의 철학적 특징중 하나가 그만의 시간성에 있다고 합니다.근대의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성의 해체를 통해서 그만의 독특한 메시아론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시간성의 해체를 통해서 과거의 잊혀진 사건,꿈들이 아닌 현재에도 진행되는 사건이며...이것이 '지금 이곳'에서 실현..극복함으로 현재가 과게에 응답하는 그러므로 현재가 과거에 메시아적 역활을 하는..이는 근대의 시간성에 대한 기존의 개념의 극복없이는 이뤄질수 없다고 보았던것입니다! 무결점 개념을 이야기 한다면 당연히 벤야민은 유대교 랍비적 맥락에서 메시아론을 설파해야겟지요..헌데 그것의 독특한 혁명성을 본 벤야민은 달리 차용하여 그만의 메시아론을 구성합니다.진중권 선생의 라캉 개념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한다고 봅니다.그것이 나의 지평을 넓혀주는 연장일수 잇다면 또는 사유의 도구 일수잇다면...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저 글을 제대로 이해한 분이 몇 분 밖에 안 되는군요. 아니, 저게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글입니까? 도대체 논지와는 별 상관없는 얘기들만 가득하군요. 이해가 안 되는 분은 kivo69님의 요약을 읽어 보세요.
ps1.
왜 열정이 필요한가? 그것은 모든 이성적인 것의 토대는 사실 비이성적인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조례의 올바름은 법률로 판단하고, 법률의 올바름은 헌법으로 판단하나, 헌법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은 사법적 논의가 아닐 겁니다. 복잡한 논의니, 이쯤 해 두지요.
ps.
벤야민을 꼼꼼히 읽으라는 분께. 님들이 들뢰즈니, 데리다니, 라깡이니 포스트 타령할 때 십 수년 전부터 주구장창 베냐민을 인용해 이 나라 사람들의 관심을 베냐민에게 돌려놓은 게 진중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세요. 글쎄요, 그 누구보다도 베냐민은 잘 이해한다고 생각해요. 왜냐구요? 글쎄요, 다른 사상가들은 모르겠는데, 적어도 그 사람이 뭔 말 하는지 잘 이해가 돼요. 거의 데자뷔 비슷한 느낌이랄까...?
syhhys님의 댓글
syhhys 작성일
....
realunity님의 댓글
realunity 작성일
제가 보기엔 진중권씨의 위 글의 주제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씨네21이 학술지가 아닌 이상 논란을 자초한 책임이 필자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글의 주제로 보이는 이른바 '좌파'에게 부족한 건 자기를 움직이는 열정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 언급하신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과 데리다와 발터 베냐민의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가 그토록 절절하게 필요했을까요? 자신만의 글쓰기 방식이야 개성이겠지만 이글은 자칫 방대한 지식의 해석과 재해석에 대한 자기과시로 읽힐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중권씨가 정말 공부많이 하신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비꼬는 게 아닙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가장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읽는 이의 입장에서 주제에 대한 근거를 설득력있게 고르고 배치한다면 글이 한눈에 잘들어와 필요없는 논쟁에 휩싸일 확률이 줄어들지 않을까요?
또한 댓글에 대한 반론에서 공부더하라는 식의 인신공격에 가까운 표현들은 답답하기까지 합니다. 지면과 방송 등에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일관된 열정을 보여주신 진중권씨의 행보에 어울리지 않는 소인배스러운 모습입니다.
특히나 진보진영에 대한 비판일수록 내용에 있어서는 냉철해야 하지만 형식에 있어서는 폄하나 경멸이 아니라 존중과 설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이 폄하나 경멸로 비치게 되면 대중들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열정'을 '주도권 다툼'으로 곡해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댓글들에 대해서도 말그대로 '발전적인' 방향에서 달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댓글 또한 자기 지식에 대한 과시에 불과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지점들에 대한 깊고 진지한 고민이 바로 '자기를 움직이는 열정'이자 더욱 중요한 '대중을 움직이는 열정'의 시작이 아닐까 합니다.
hori님의 댓글
hori 작성일
angelusnov가 진중권이 맞다면 개쓰레기네요. 진중권 당신의 문제는 지적자아도취에 있다. 세상사람이 다 당신같은줄 아나? 당신이 알고 이해하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이해할거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오류와 착각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모른다는게 안타깝고 유감스럽다. 적어도 대중과 소통하려면 대중의 수준과 레벨에 맞게 하는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만약 대중이 어려워한다면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하는거 아닌가.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네티즌을 상대로 훈계하려들고 꿀밤주는건 무슨 행태인가? 왜 가르치려드나? 본인이 그렇게 잘났다고 생각하는가? 아무리 머리좋고 말 잘하면 뭐하나? 기본이 안되어있는데. 인간성이 글러처먹었는데. 당신의 글을 좋아하고 지지해준 사람들에게 이렇게 배신과 실망을 안겨줘서야 되겠는가. 나야 뭐 당신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관심있게 기사도 읽고 그래도 좋은 지식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은 곤란하다. 얼마나 유치한짓거린가. 네티즌이 댓글단것에 그렇게 과민하게 혼자 열폭해서 일일이 반박 댓글을 다는게 초딩이나 할짓이지. 당신의 글을 읽고 꼭 이해해야 하나? 당신의 글을 읽고 100%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려운게 당연하다. 그게 정상이다. 당신이 그렇게 수준 운운하는건 꼴사납고 재수없다. 당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나? 국민과 소통 못하는 이명박과 뭐가 다른가? 이봐 진중권씨. 책 그만읽고 인성이나 길러라. angelusnov- 이 아이디가 진중권 본인이든 아니든 당신의 댓글을 보고 일부러 로그인해서 댓글을 단다. 그냥 지나칠수 없어서. 국민과의 소통 실패,네티즌과의 소통실패, 진보신당이나 당신이나 똑같지. 당신이 아무리 똑똑하고 지식이 많아봐야 그런 과민반응이나 오만한 태도는 대중들로부터 지지는 커녕 쓰레기로 취급받을 뿐이다. 당신이 한나라당 보수와 다를게 뭔가. 참여정부내내 똑같이 대통령 욕했으면서. 진보가 뭐 밥먹여주나. 진보면 꼭 뭐가 있어보이는것처럼. 대중 수준 운운하기 전에 예의나 갖춰라. 니가 생각하는 만큼 대중은 그렇게 우둔하지 않다. 내가 보기엔 당신이 우둔한거 같은데. 이게 뭐가 어렵냐고? 더이상 어떻게 더 쉽게 글을 쓰냐고?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당신의 글이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당신 자신밖에 없을거다. 어렵게 써놓고 더이상 어떻게 쉽게 쓰냐니? 거의 정신병자 수준이군. 어이가 없어서. 모르는거 이해못하는거 챙피한거 아니다. 모르고 이해못하는게 당연하다. 너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데 그걸 어떻게 아나? 그냥 너 자신이나 돌아봐라. 더이상 이제 당신은 꼴보기 싫어서 안본다. 정치적 올바름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왠만하면 좀 갖췄으면 좋겠다. 당신은 뇌는 발달했는데 심장이 없어. 불쌍한 놈.
hj0084님의 댓글
hj0084 작성일
바로 윗분의 댓글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진중권 님에 대한 인간적 평가를 해선 안 될 듯 합니다. 글 자체의 논리적 구성이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가능하겠지만, 당신의 자세는 왜 그러냐는 식의 반응은 곤란한 듯 합니다. 저의 첫번째 댓글에서도 말했지만, 사람마다 서로 다른 생각을 맞춰나가기 위해 이런 댓글을 달지 않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진중권 님이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썼다고 해서, 또는 댓글에 대한 응답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고방식을 보였다고 해서 인신공격적인 발언을 한다면, 비판과 비평이 아닌 비난일 뿐이고 보다 건설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댓글을 달은 다른 분들도 다름의 차이를 보다 존중하길 바랍니다.
baltak1님의 댓글
baltak1 작성일
언어의 나이트 클럽
tajohn님의 댓글
tajohn 작성일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니 손가락 펴는 법, 손가락의 모양새, 손가락 주인의 품성에 대한 잡설들만 드높구나. 바야흐로 인문학 잉여들의 향연이로세.
asarabyo님의 댓글
asarabyo 작성일
"모든 이성적인 것의 토대는 사실 비이성적인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모든 의식의 토대는 무의식에 있기 때문이다." 또는
"모든 밝음의 토대는 어두움이다."
"모든 진리의 토대는 거짓이다."
"모든 삶의 토대는 죽음이다."
뭐 이런 '대극합일' 혹은 '중용' 명제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면 될라나...
아니면 혹시 이 모든 소모적인 논쟁이야말로 라깡의 상징계를 적나라하게 증명해준다고 이해하면 될라나...
재미는 있는데, 씁쓸도 하네요...
kumis97님의 댓글
kumis97 작성일
이번 논쟁,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 이택광 선생의 관전평이 정확한 것 같군요.
spinoc님의 댓글
spinoc 작성일
아마 한겨레에서 김규항 씨와 진중권 씨가 설전을 벌였나보다. 김규항 씨가 진중권 교수를 진보신당 당적을 가지고 있는 자유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진중권 씨가 김규항 씨를 좌파바바리맨으로 놀리고 툭탁툭탁 ...
이 와중에 진중권 씨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가지고 이 '유물론적 신학'이라는 글을 썼다고 해서 와서 읽어봤다.
근데 진중권 교수가 해석하는 바에 따르면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기껏해야 칸트의 규제적 관념(regulative idea)의 역할 정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그 이상적 상황에 끊임 없이 접근할 수 있지만, 실제로 거기에 도달할 수는 없는, 그런 방향 제시적 역할만을 하는 관념. 더 나쁜 것은 칸트의 규제적 관념과 달리 진중권 교수에게서 그것은 심지어 이 자리에서 실현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으로 금지되고 있다는 것이다(칸트에게 있어서 규제적 관념의 실현은 물론 객관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 실현을 위한 '노력'의 금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 ). 그래서 진중권 교수에 따르면 유토피아란 있는 듯 없는 듯 대충 어디 짱박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벤야민의 '난장이' 처럼 . . .?
이 때문에, 자신의 빨간 유토피아적 이상을 사람들 앞에서 시도 때도 없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김규항 씨는 진중권 교수 눈에는 노출증에 걸린 좌파바바리맨에 불과하다. 90년대에 그렇게 유행하던 포스트모던적 반성에도 전혀 영향받지 않은 채 고고하게 80년대식 빨간 책들을 아직꺼정 골방에서 붙들고 앉아서 탐독하다가 가끔씩 사람들 앞에 나타나 자신의 바바리를 펼치고 그 흉칙한 빨간 것을 들이미는....
물론 이 글을 읽고 나서 내가 어안이 벙벙해진 것은, 실제로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가 주장하는 것은 칸트의 규제적 관념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 되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역사철학테제}에서 벤야민은 어떤 미래의 유토피아를 향해 우리가 끊임없이 전진해 나가고 있다는 식의 '진보'의 관념을 비판하면서, 바로 그렇게 우리가 (진중권 교수가 말하듯) 이상향을 향해 지금 조그만한 '구체적인' 개량적 실천들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관념을 비판하면서, 반대로 그러한 개량적이고 목적론적인 진보 관념의 '메시아적 중단'을 역설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벤야민은 과거에 실패한 혁명에 대한 트라우마적 기억을 (다르게) 반복하기 위한 도약, 과거를 향한 호랑이의 도약을 행할 것을 주장하고 있지 않던가? 바로 그러한 한에서, 그는 이를 위해 우리가 메시아적인 신학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던가? 유물론자인 우리가 여전히 이러한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유물론적으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 한 판 승부를 벌여볼만 하지 않은가 하고 묻지 않던가?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알기로 지젝도 유사한 해석을 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 80년대의 실패한 붉은 혁명의 기억의 편린을 붙잡고 시대착오적으로 살고 있는 김규항 씨야말로 어떻게 보면 이러한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나 또한 김규항 씨의 언어가 좀 더 세련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만(하지만 또한 그의 오래된 투박한 용어법이 때로는 신선하게 들릴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단순한 좌파바바리맨의 홀딱쇼로 놀리는 것이 도대체 지금 어떤 진지함을 가지고 있는 비판인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진겔루스 노부스의 '베냐민'적 무식함이라니! 그것을 옹호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맨 윗 분. 어이구 또 잘난 척 하시는 분, 나타나셨네요. 그래서 베냐민의 메시아주의를 이 시대에 받아들이라는 겁니까? <폭력에 관하여>에서 언급한 순수한 신적 폭력? 뭐, 신학 갖고 한판 붙자구요? 지젝은 그렇게 했다구요? 그래서 지젝이 뭐 하자고 합디까? 버틀비가 뭔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하자는 거죠. 내 참... 남의 무식을 폭로하고 자신의 유식을 드러내느라 책을 읽으시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는 이렇게 자기 무식만 드러내게 됩니다.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난 내가 얼마나 유식한지, 또 님들이 얼마나 유식한지 관심 없거든요. 그러니 시비를 걸려면 좀 내용 있게 거세요.
angelusnov님의 댓글
angelusnov 작성일
님들의 베냐민들이 뭔 뻘소리를 갖고 쌈질하고 자빠졌는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들 해 보셔.
http://programto.net/wordpress/?p=918
spinoc님의 댓글
spinoc 작성일
역사철학테제 11
디지털 시대의 기수 진중권 교수께 드리는 벤야민의 찬가
XI
The conformism which has been part and parcel of Social Democracy from the beginning attaches not only to its political tactics but to its economic views as well. It is one reason for its later breakdown. Nothing has corrupted the German working, class so much as the notion that it was moving, with the current. It regarded technological developments as the fall of the stream with which it thought it was moving. From there it was but a step to the illusion that the factory work which was supposed to tend toward technological progress constituted a political achievement. The old Protestant ethics of work was resurrected among German workers in secularized form. The Gotha Program * already bears traces of this confusion, defining labor as ‘the source of all wealth and all culture.’ Smelling a rat, Marx countered that ‘…the man who possesses no other property than his labor power’ must of necessity become ‘the slave of other men who have made themselves the owners…’ However, the confusion spread, and soon thereafter Josef Dietzgen proclaimed: ‘The savior of modern times is called work. The …improvement… of labor constitutes the wealth which is now able to accomplish what no redeemer has ever been able to do.’ This vulgar-Marxist conception of the nature of labor bypasses the question of how its products might benefit the workers while still not being at, their disposal. It recognizes only the progress in the mastery of nature, not the retrogression of society; it already displays the technocratic features later encountered in Fascism. Among these is a conception of nature which differs ominously from the one in the Socialist utopias before the 1848 revolution. The new conception of labor amounts to the exploitation of nature, which with naive complacency is contrasted with the exploitation of the proletariat. Compared with this positivistic conception, Fourier's fantasies, which have so often been ridiculed, prove to be surprisingly sound. According to Fourier, as a result of efficient cooperative labor, four moons would illuminate the earthly night, the ice would recede from the poles, sea water would no longer taste salty, and beasts of prey would do man's bidding. All this illustrates a kind of labor which, far from exploiting nature, is capable of delivering her of the creations which lie dormant in her womb as potentials. Nature, which, as Dietzgen puts it, ‘exists gratis,’ is a complement to the corrupted conception of labor.
*The Gotha Congress of 1875 'United the two German Socialist parties, one led by Ferdinand Lassalle, the other by Karl Marx and Wilhelm Liebknecht. The program, drafted by Liebknecht and Lassalle, was severely attacked by Marx in London. See his ‘Critique of the Gotha Program’
wolfear님의 댓글
wolfear 작성일
리플들 중에서 가장 싼티나는 리플은 offname 본인의 리플들인듯..
satia13님의 댓글
satia13 작성일
1. 글의 주제 파악은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는 것으로 아는데, 글의 주제는 뒷전이고 라깡이나 지젝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은 중거니횽님 말대로 '시비' 이상도 이하도 아니네요. 책 몇 권 읽어봐서 들어봤던 내용 나온다고 시비 거셨던 분들 부끄러운줄 알아야합니다. 그렇게 시비 거시는 분들은 무슨 학술적 성과가 대단하신 분들이길래 낭만주의자니 몰이해니 씹어대시는지 모르겠네요. 기가차고 우습네요.
2. 도대체 이 글이 이해가 안가신다는 분들. 중거니횽의 글들은 수능 언어영역 비문학에도 나오는데(문제집에서 봤음), 언어영역 점수가 예상이 되네요. 뭐 이건 만화로 그려줘야되나.
satia13님의 댓글
satia13 작성일
우리는 결코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아무 데도 없다’를 의미하는 그 낱말의 뜻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거기에 그저 무한히 근접할 수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현실에서 유리된 실험실에서 사유하는 한두 사람의 레토르트 몽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그림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삶에서 유리된 정치적 수도원에 사는 몽상가들이 그리는 유화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사는 수많은 이들의 꿈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퍼즐이다.
아름답네요
cinepoet님의 댓글
cinepoet 작성일
글 내용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되나, 난 그저 이 글이 김규항 깔려고 쓴 것 같다는 생각 밖엔 안드는데ㅋ 덧붙여, 친히 댓글 다시는 진중권씨께 한마디 드리자면 다른 걸 떠나서 나름 본인의 글을 읽고 그게 맞든 틀리든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예의를 갖춰야하지 않을까요? 소아병이니 열등의식, 무정자증, 무식 운운하면서 본인 스스로 자신만 옳다고 하고 계시니(물론 진중권씨는 그럴만한 용기의 근원이 충분하시겠지만) 그저 읽기만 하는 입장에서도 꽤나 불쾌하게 느껴지네요. 마치, 이 글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면 진중권이 생각하기엔 고졸 능력도 못갖춘것이다 라든지 내용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는 사람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제넘게 시비거는 훈고학자니 틴에이저 철학자가 되버리는 것 같네요. 뭐, 본인이 잘났는지 못났는지 유식하니 무식하니 별 관심이 없다고 하셨으니, 차라리 처음부터 댓글은 댓글로서 치부해 버리셨더다면 어땠을런지 생각해 봅니다.